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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드보이 결말 해석 - 금기 욕망 그리고 죄책감 (2003년) 스포주의

by 올영 2018. 11. 6.

주의 : 결말까지 스포가 있습니다

 

 <올드보이>는 미국, 인도(인도는 그냥 표절)에서 리메이크 되기도 한 박찬욱 감독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2만 달러에 판권을 샀는데  일본에 200만 달러에 역수출하였다고 하더군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2003년도에 봤을 때는 영화는 괜찮은데 조금은 거부감이 생기더군요
그 거부감의 원인은 아마도 근친이라는 우리 사회의 금기를 건드렸기 때문일 겁니다





이번에 다시 보고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자살남의 넥타이를 잡고 있는 오대수의 강렬한 영화 첫 신의 의미였습니다
자살남은 강아지를 안고 있는데 먼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엄청난 애견인인가라고 가볍게 넘어갔들랬지요

근데 이 장면이 수간을 의미한다고 하더군요
그 자살남이 "짐승만도 못한 놈일지라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한 말의  의미를 확실히 알 것 같더군요

 

자살남


수간이라는 또 하나의 금기를 명확히 드려내지 않은 건 다행입니다 웬만한 성인물에서도 다루지 않을  근친에 수간까지 나온다면 거부감이 생기는 관객은 더 많았을 것입니다

오대수라는 이름이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서 따왔다는 말도 있더군요

원작에도 없는 근친과 수간이라는 소재를 왜 넣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거부감과 함께 생각해보니 이 영화는 복수가 큰 줄기이긴 하지만 금기와 욕망 그리고 죄책감에 대한 영화로 보였습니다

외국인이 보고 가장 기겁한 장면이 오대수가 산낙지를 먹는 장면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음식입니다 하지만 외국인에게는 일종의 금기같은 것입니다 살아있는 더구나 혐오스러운 낙지를 날 걸로 먹는다는 것은 일종의 금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이런 문화적 금기의 차이까지 고려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근친이라는 금기를 어겼지만 걸리지만 않았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대수에 의해 둘의 관계는 폭로되고 자살하려는 수아의 손을 이우진은 놓아버리죠



인간들이 모야 공동체와 사회를 이루어 살게 되면 서로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금기라는 것을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망에 의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입니다 그래서 금기라는 것을 어기게 되고 어기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화를 통해 금기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성으로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욕망에 의해 금기를 어기게 되면 죄책감이라는 것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 욕망의 열매는 달콤하여 죄책감을 넘어서게 되고 결국에는 금기라는 것을 쉽게 어기게 됩니다 그 수준에 도달하면 욕망에 사로잡혀 스스로는 제어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라는 말이 바로 금기를 어기고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우진은 친누나인 수아와 성관계까지 맺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사랑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아는 이우진과 근친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상상임신까지 하죠 수아의 상상임신 그리고 자살 그리고 이우진의 자살방조 이 모든 것은 결국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죄책감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오는 것입니다  

수간을 한 자살남과 오대수는 같은 말을 하죠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란 결국 사회적 인식이지 자살남과 오대수의 내부에서 나온 인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머가 먼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동물과 결혼한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군요

오대수는 딸인 미도와의 사랑이라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최면을 걸어 모든 사실을 잊으려고 합니다 즉 모르면 걸리지만 않으면 욕망을 이룰 수 있는 거죠 그렇게 되면 죄책감도 사회적 질타도 없을 것입니다


 


오대수와 이우진의 출신 고등학교인 상록 고등학교가 천주교 학교라는 점도 바로 종교적 관점에서 가장 엄격해야 할 금기와 욕망 그리고 죄책감을 표현하기 위함으로 보이더군요

<올드보이>에서의 금기를 어기는 모습은 한쪽의 일방적인 욕망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금기를 어기는 행위에 대해 관객은 무조건적인 비난을 할 수 없게 만들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죠

따라서 성격은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좀 더 확장해본다면 인간이 성공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더 많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과의 욕망과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고 금기를 어기게 되기도 합니다

최근의 미투 운동이나 비리 뇌물 등으로 얼룩진 정치 상황을 보면 인간의 욕망과 금기 그리고 죄책감의 의미를 다시 생각나게 하더군요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 주위를 봐도 대부분의 갈등은 욕망의 충돌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인간은 '욕망의 노예'라고 한때 생각했던 건 나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내적으로는 욕망과 금기 그리고 죄책감 속에서 혼돈을 겪으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근친이 금기시 되는 이유를 찾아보니 웨스터 마크 효과, 근친교배 회피이론, 마빈해리스의 문화선택이론, 말리놉스키의 가족분열이론등이 있더군요 일리는 있는 듯 하지만 또한 반박도 존재하여 완전한 설명이라고 하기에도 조금은 부족해 보이기도 하더군요 하긴 인문학이 자연과학처럼 완벽한 설명이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는 자연과학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근친교배회피이론이 가장 당기는데 자연상태에서 동물의 근친교배는 1%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근친교배가 여러세대를 걸쳐 반복되면 열성인자가 누적되고 유전자의 다양성을 잃게 되어 유전자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런 자연의 법칙이 발전하여 사회적 금기가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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