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결말까지 스포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다시 보니 왜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영화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이경규의 몰래카메라가 유행한 적이 있고 현재도 예능에서 심심치 않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아마도 남을 속이는 남을 농락하는 마치 신이 된 듯한 장난스러운 관음증이 이 영화의 아이디어의 시작점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트루먼 쇼>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에 관심이 있으면 현재도 가끔 듣게 되는 말입니다 본 적은 있는데 대충 봐서인지 전체적인 설정과 몇 장면만 기억나더군요
이 영화를 다시 보기 전까지 <트루먼쇼>는 관객이 사실은 몰래카메라였다는 사실을 마지막에 알게 되는 반전의 영화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트루먼쇼>는 반전영화가 아니고 처음부터 관객에게 이건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시작합니다
가상현실하면 <매트릭스>인데 사실은 <트루먼 쇼>가 먼저였군요
하긴 영화 자체가 일종의 가상현실이긴 합니다
이런 식의 구성은 트루먼이 처음부터 어떻게 TV프로그램 속에서 농락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같습니다
이 영화는 다양한 의미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트루먼 쇼>가 명작이 된 이유일 것입니다
<트루먼 쇼>에서는 1998년경에는 TV로 대표되는 미디어와 시청자에 대한 풍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한때 TV를 사람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브라운관만 바라보게 만든다 하여 '바보상자'라고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
<트루먼 쇼>에서의 시청자들은 이 트루먼쇼에 대한 비판의식 없이 오직 크리스토퍼(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기쁨 슬픔 감동을 소비할 뿐입니다
광고는 덤이겠죠
트루먼이 크리스토퍼에 의해 농락된 삶을 살았듯이 미디어에 의해 걸러진 또는 만들어진 세상에서 농락당하는 모습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트루먼 쇼'가 끝나자 "딴 채널에서는 뭐해?"라고 동료에게 묻는 장면은 바로 이러한 시청자들에 대한 풍자라고 보입니다
양방향 시스템과 블로그를 포함한 1인 미디어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미디어는 매우 강력한 사회적 권력자입니다 대중은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고 이해합니다
<트루먼 쇼>는 트루먼이 신이자 아버지인 크리스토퍼가 만들어 놓은 세상을 극복하는 과정의 영화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측면은 일종의 성장 드라마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나이 서른에?)
우리의 삶은 트루먼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정해진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일상의 반복은 익숙함에서는 오는 편안함입니다
때로는 트루먼이 피지로 가려고 하듯 변화를 갈망하고 시도도 해보지만 결국은 익숙함의 편안함으로 돌아오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집 나가면 고생이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자유의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트루먼과 같이 두려움, 외부의 자극과 영향에 의한 결과물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스튜디오가 아닌 세상이라는 곳에서 트루먼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짐 캐리의 웃음 뒤에 페이소스 (슬픔 연민 동정이 느껴지는 것)가 있는 연기는 영화의 메시지와 어우러져 찰리 채플린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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